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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배경

분당 유치원 앞 '매국노 이완용' 비석, 설치 1주일만에 철거

by 늑대 뛰어넘기 2023. 11. 28.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0667

 

유치원 앞 '매국노 이완용' 비석, 설치 1주일만에 철거 무슨일 | 중앙일보

앞서 성남문화원은 3000만원의 예산으로 10개의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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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성남문화원은 분당의 한 유치원 인근에 설치했던 비석을 1주일만에 철거하기로 밝혔습니다.

 

 

■ 이완용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완용 (출처 : 위키백과)

 

이완용은 1858년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재 분당구 백현동)의 가난한 양반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1세때 먼 일가인, 흥선대원군의 친구이자 사돈이었던 판중추부사(조선시대 종1품, 오늘날 정무장관급)이호준의 양아들이 되었고, 13세에 명문가 조병익의 딸과 혼인하였습니다.  

 

20세까지 한학교육을 받았고,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당시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과 가깝게 지내면서 명성황후의 총애를 얻었고, 수구파의 한 사람으로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습니다.

 

구한말 미국과 교류가 긴요해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1887년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근대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최초 주미 공사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외교관 생활을 했습니다.
주미참찬관으로 시작, 임시대리공사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890년에 귀국하였습니다. 이후 대미외교의 1인자이자 친미파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896년부터 1898년까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자주독립과 신정치운동에 앞장 섰습니다. 당시 각종 이권을 열강에 넘겨준 책임을 물어 제명되어 독립협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후 전북 관찰사 재직 시 직무태만으로 감봉 처분을 받았고, 백성의 재산을 착복하다 파면위기까지 몰렸으나, 특별사면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출처 : 위키백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하자  친일파 정치인으로 돌아섰고, 1905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기 위해 대신들을 위협하며 조약체결을 강요하자 적극적으로 이완용이 주도했습니다.

그는 을사조약을 맺을 수 있도록 고종을 협박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수모를 겪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내각총리대신으로 매국 내각의 수반이 되었으며,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하였습니다.

 

1907년에는 헤이그에 특사를 보낸 고종에게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하는 등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이완용은 1909년에 이재명 의사에 의해 세 번이나 칼에 찔렸으나 죽지 않았고, 1910년에는 한일강제병합을 주도해 우리나라를 일본에게 완전히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출처 : 인터넷

 

■ 이완용의 본관은 어디일까요?

많은 분들이 전주 이씨로 알고 있지만, 황해도가 본관인 우봉 이씨입니다.

 

우봉 이씨 유례 :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

우봉 이씨 시조 : 이공정 (고려 명종 때 문하시중 / 오늘날의 총리)

역사적 인물 
 1) 이자성 (고려 문하시랑평장사 / 오늘날 부총리)
 2) 이승건 (조선 호조참판 / 오늘날의 기획정부장관)

 3) 이완용 (족보에서 제명....ㅡ.ㅡ)

 4) 이어령 (대한민국 문화부 장관, 노태우 정부)

 5) 이병도 (대한민국 문교부 장관, 허정 과도내각)

 

 

■ 이완용의 후손들은 잘살고 있을까요?

 

이완용은 독립협회시절 열강에 이권을 넘겼다는 내용이 위에 있습니다. 그 대가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고, 매국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아주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당시 경성 최고의 현금부자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때 여의도 면적의 8배 가까운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해방 전 소유하고 있던 땅의 98%를 팔아치웠고, 현금화가 된 그 돈은 어디로 흘러갔는지 파악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완용 후손들은 1992년 서울 북아현동 땅이 이완용으로부터 물려받아야 할 땅으로 국가를 상대로 소 제기를 했습니다. 소송에서 이긴 이완용의 후손들은 그 땅을 당시 기준 30억원에 팔아버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갔습니다. 당시 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이완용 재산 몰수 서명운동을 진해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 재산 환수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지만, 환수한 이완용 일가 땅은 불과 3천여평에 불과하였다고 합니다. 

어디로 흘러들어갔을지도 모를 그 많은 현금과 환수 받은 땅 값 30억원으로 이완용의 후손들은 아마도 잘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