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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배경

'서울의 봄' 열흘 만에 300만 관객 돌파

by 늑대 뛰어넘기 2023. 12. 1.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며 스크린을 장악한 영화 '서울의 봄(김성수 감독)이 개봉 10일 차 누적관객수 300만 명을 돌파하는쾌거를 달성했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을 막기 위한 일촉즉발의 9시간을 그린 영화. 개봉 4일 차 100만, 6일 차 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폭발적인 상승세를 기록 중인 '서울의 봄'은 개봉 2주 차에 접어든 1일, 개봉 10일 만에 300만 관객을 넘어서면서 관객들의 뜨거운 관심을 입증했다.

이는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 유일하게 1000만 관객을 동원한 '범죄도시3'가 개봉 4일 차 300만 관객을 돌파한 기록과, 역대 11월 한국영화 개봉작 중 가장 많은 707만 명의 관람객을 동원한 '내부자들'(2015) 이후로 가장 빠른 흥행 추이다.

 

작품성 높은 결과물에 관객들이 즉각 반응했기에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 하반기 극장가에 호황기를 안겨준 봄바람 같은 영화로 입지를 굳히고 있는 '서울의 봄'에 대해 관객들은 자발적 입소문 추천과 함께 n차 관람을 이어가고 있다.

 

■ 감독과 출연진은?

 

김성수 감독은 영화 비트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의 감독으로 필모그래피는 '런어웨이(1995년)', '비트(1997년)', '태양은 없다(1999년)', '무사(2001년)', '영어 완전 정복(2003년)', '감기(2013년)', '아수라(2016년)' 등이다.

 

'서울의 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간섭하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기 '프라하의 봄'에서 따온 말이다. 1968년 당시 체코슬로비키아는 개혁파 알렌산데르 둡체크가 집권하면서 경제와 정치면에서 부분적인 분권화를 실시하여 시민의 자유를 보다 보장하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소비에트연방과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개혁이 중단되면서 '프라하의 봄'은 막을 내렸다. '서울의 봄'은 10ㆍ26사태 이후부터 이듬해 5ㆍ18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날 때 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열기가 확산되던 시기를 의미한다.

 

■ 12ㆍ12 군사반란은?

작전명 '생일집 잔치'로 알려진 1979년 12월 12일에 발생한 군부 실제 전두환, 노태우 등이 주임이 되어 일으킨 군사반란 사건을 말한다. 이들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의 재가와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는 '양동작전'을 일으킨 사건이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뒤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당시 계엄사령관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었으며, 보안사령관으로 있던 전두환 소장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다. 두 사람은 사건수사와 군의 인사문제로 갈등이 있었으며, 전두환의 신군부세력은 군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10ㆍ26사태의 방조혐의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내란죄를 씌워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에 대한 재가를 얻으려 했다. 재가 자체가 안될 것을 우려한 신군부는 전두환이 직접 최규하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기로 하고, 동시에 12일 저녁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와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이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출처 : 나무위키

 

■ 군사반란 이후는?

군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반란군은 5ㆍ17쿠데타를 거쳐 1년도 안되어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추대함으로써 정권을 찬탈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 7년, 노태우 정권 5년 도합 12년 동안 대한민국을 지배하며 갖은 비리와 영화를 누렸다.

 

5ㆍ17쿠데타는 1980년 5월 17일에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인사가 정권 장악을 목표로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일으킨 사건이다. 정치활동 일체금지를 통해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옥내외 집회 및 시위 금지, 태업 및 파업 시 엄단의 조치를 하는 등의 내용이다. 이런 비정상적 상태에에서 광주 시민들을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무력을 짓밟은 사건이 5.18 민주화 운동이다. 

 

■ 하나회는?

하나회는 육사 11기(51년 입학, 55년 임관) 동기들과 육사 후배들로 구성된 군대 내 비밀 사조직이다. 당시 가입의식은 비밀리에 치러졌고, 서약을 위반 시 인격말살까지도 감수한다는 배신방지 조항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친목회로 출발한 이 조직은 제3공화국 시기, 박정희 대통령의 은밀한 후원 속에 성장해 나갔다. 12 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하나회였다.  

 

■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 후 철저히 비선 조직을 통해 하나회 숙청 계획을 짰다. 당시 비선 조직은 절친인 김윤도 변호사가 이끄는 조직과 기무부대장 출신의 예비역 중령 A씨를 비롯한 예편 장교로 구성되었다. 특히 김영삼은 취임하자 마자 육,해,공군의 중장 이상이 참석한 보고회의에서 군 지휘부의 노고를 치하하는 등 아낌없이 칭찬을 쏟아내 하나회 출신들을 안시시켰다. 취임 11일이었던, 93년 3월 8일 하나회 출신인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를 전격 보직해임했다. 두 사람은 전화로 해임통보를 받아 갑작스럽게 옷을 벗었다. 4시간 후 비하나회 출신인 김동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으로, 기무사 참모장 김도윤을 기무사령관에 임명했다. 4월 2일 하나회 출신 김형선 특전사령관과 안병호 수방사령관이 전격 경질되었다. 우선 교체된 육참총장, 기무사령관, 특전사령관, 수방사령관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핵심 보직으로 해석된다.

이후 하나회출신, TK(대구경북)출신의 전두환 또는 노태우계 출신 장성들을 몰아냈다.